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왜 '모의해킹'에 투자하는가
실리콘밸리의 성공 공식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혁신과 속도가 전부였다면, 이제는 보안이 새로운 성장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신기능 출시의 환호성보다 "이 기능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이 먼저 나오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구체적인 숫자로 증명됩니다. 최근 KPMG 보고서에 따르면 IT 기업 CEO의 74%는 '사이버 리스크'를 성장의 걸림돌로, 61%는 '정보 보안'을 경쟁력의 원천으로 꼽았습니다. 구글, MS 같은 빅테크가 'Secure by Design(설계부터 안전하게)' 원칙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문제가 터진 뒤 수습하는 사후 대응에서, 잠재적 문제를 먼저 찾아 제거하는 사전 예방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전 예방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모의해킹입니다. 적의 창으로 나의 방패를 시험하듯, 실제 공격자 관점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이죠.
이 글은 모의해킹이 어떻게 단순한 기술 점검을 넘어, 비즈니스의 성패를 가르는 실리콘밸리의 핵심 전략이 되었는지 알려드립니다.
보안이 ‘선택’에서 ‘생존’이 된 순간
기업들이 보안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한번의 실수가 초래하는 대가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솔라윈즈(SolarWinds) 공급망 해킹 사건입니다.
2020년, 솔라윈즈의 IT 관리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파일에 해커들이 백도어를 몰래 심었습니다. 이 제품은 미국 정부 기관부터 글로벌 대기업까지 18,000여 곳에서 사용하고 있었죠. 그 결과, 많은 조직의 내부 시스템이 동시에 감염됐고 미국 정부 전체가 대응에 투입한 비용은 1,0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에퀴팩스(Equifax) 개인정보 유출 사고 역시 뼈아픈 교훈을 남겼습니다. 미국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에퀴팩스는 이미 패치가 공개된 웹 취약점을 방치하다, 무려 1억 4천만 명의 개인정보를 유출시켰습니다. 피해 보상과 벌금으로 최대 7억 달러에 합의했지만, 최종 손실은 14억 달러를 훌쩍 넘겼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더 큰 피해는 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의 붕괴였습니다.
이처럼 대형 보안 사고는 단순한 금전적 손실을 넘어, 기업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규제 조사와 법적 책임으로 이어집니다.
달라진 규제의 무게: '노력'을 증명하라
글로벌 보안 규제의 흐름도 이제는 ‘사고가 났느냐’보다, 그 사고를 막기 위해 기업이 어떤 준비를 해왔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유럽의 일반 개인정보보호법(GDPR)은 사고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이 충분한 보안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면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미국의 FTC, HIPAA, PCI-DSS 등 주요 규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리스크를 사전에 인지하고 점검했는가', '대응 체계를 갖추었는가'를 책임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삼습니다.
과징금 규모 또한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브리티시 에어웨이(British Airways)는 2018년 해킹으로 약 50만 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고, 약 2,000만 파운드(약 34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습니다.
우버(Uber)는 2016년 해킹 사고를 은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과 영국 양국에서 각각 수백만 달러의 벌금을 냈고
티모바일(T-Mobile), 야후(Yahoo), 메타(Meta) 같은 기업들도 줄줄이 개인정보 유출로 수천만에서 수억 달러 규모의 과징금을 물었죠.
결국 '우리는 최선을 다해 예방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법적 책임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되었고, 이는 곧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 되었습니다.
보안은 이제 ‘브랜드 신뢰’의 기준
요즘 글로벌 소비자들은 단순히 기능이 좋은 제품을 찾지 않아습니다.
“내 정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회사인가?”를 먼저 확인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데이터 침해 후 소비자의 58%가 해당 기업을 더는 신뢰하지 않고, 70%는 아예 재구매를 하지 않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사고의 기술적 피해보다도 브랜드가 입는 장기적인 타격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뜻이죠.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보안은 더 이상 비용이 아니라, 고객의 신뢰라는 핵심 자산을 쌓는 투자입니다. "우리는 안전합니다"라는 말을 공허하게 외치는 대신, 공격자 관점의 검증을 통해 그 신뢰를 행동으로 증명하고 고객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위험을 선제적으로 다루는 법, 모의해킹
그렇다면 기업들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신뢰'를 행동으로 증명할까요?
사고 리스크와 규제 책임, 브랜드 붕괴라는 위협에 맞서 실리콘밸리가 내놓은 답은 명확합니다. 바로 스스로를 가장 먼저, 가장 날카롭게 공격해보는 것, 모의해킹(Penetration Testing)입니다.
모의해킹은 외부 공격자의 관점에서 보안 취약점을 식별하는 테스트입니다. 단순 체크리스트 기반 취약점 진단이 아닌, 실제 공격자가 시도할 법한 시나리오를 구성해서 우리 서비스에 어떤 허점이 숨어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과정이죠.
*모의해킹이 생소하다면 모의해킹 시리즈의 첫 글을 먼저 참고해 보세요!
이러한 선제적 방어는 이미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신 AI 기술의 선두주자인 앤트로픽(Anthropic)은 자사 AI 모델을 모의해킹 공격자로 활용해, 실제로 자사 시스템을 공격해보게 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잠재적인 치명적 취약점을 조기에 발견했고, 즉각적인 보완 조치까지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메타와 구글 역시 수년 전부터 자체 모의해킹팀을 운영하며, 주요 시스템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공격 시나리오를 실행해 보안 수준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메타의 'Red Team X'는 Cisco VPN, Android 시스템 같은 외부 기술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아 사전에 취약점을 찾아내고 패치를 유도해왔고, 구글은 2016년부터 사내 시스템과 클라우드 인프라 전반을 공격자 시선으로 점검하는 프로세스를 정례화해 이를 실제 방어 체계 개선에 반영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내부 모의해킹 팀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는 전문 업체에 정기적인 외부 모의해킹을 의뢰하거나, 외부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버그바운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증명됩니다. 미국 데이터 조사 기관에 따르면 전 세계 모의해킹 시장 규모는 2024년 약 17억 달러에서 2029년에는 무려 39억 달러 이상으로 커질 전망입니다. 이는 모의해킹이 일회성 점검을 넘어, 지속 가능한 리스크 관리의 핵심이자 신뢰를 얻기 위한 필수 투자로 자리 잡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글로벌에게 보안은 ‘투자’, 한국은 아직도 ‘비용’
현재 글로벌 기업들이 보안을 '신뢰를 위한 투자'로 여기고 있는 반면, 국내 많은 기업은 여전히 '비용'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문제 해결에 급급해 최소한의 규제만 맞추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죠. 바로 이 인식의 차이가 지금 한국과 글로벌 스탠다드 사이의 가장 큰 격차를 만들고 있습니다.
보안은 결국 태도의 문제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 신뢰를 만드는 방식, 조직이 스스로를 점검하려는 의지. 이 모든 게 담긴 전략이자 문화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물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당신의 회사는, 보안을 아직도 비용으로 보고 있나요?
아니면 브랜드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투자로 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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